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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虛)의 생성론(生成論) 
becoming of emptiness 
  
글 / 황 의 필(미술평론가)
  
  
현대미술계에서는 문자와 소리의 현상을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종종 나타난다. 이는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에크리튀르(ecriture), 즉 일관성 없는 사본(le double inconsistant d'un signifiant majeur)의 논리와 맥을 같이 한다. 말하자면 원본주의에만 충실하려는 예술은 더 이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김명수는 자연을 표현하지만 그 자연 됨을 일정한 원본의 복제로 애용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현상을 포착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올려는 의지가 강하다. 
예를 들면 여백이나 묵의 농담 관계가 그러하다. 여백을 여백이 되게끔 공간을 부여하지 않는다. 더불어 묵의 농담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이는 플라톤(Plato)이 말한 바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문자와 소리에 대해서 보조 기억 수단술인 히포므네시스(hypomnesis)와 살아있는 기억인 므네메(mnémè)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기억으로서의 생성이 부유한다. 
더 나아가서 데리다가 지시하는 생성의 개념은 대리보충과의 대립 속에서 기능한다. 이른바 테크네(techè)로서의 표상이 그러하다. 즉, 테크네의 발생은 표상을 점층화로 이끌면서 끊임없이 충보해야할 상황을 지속으로 전개시킨다. 
대리보충은 보충성(supplémentarité)으로 규정지어야할 그 무엇이 흐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또 다른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가올 수가 있다. 곧 스스로는 채울 수 없으니 그에 부합하는 것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때문에 기호나 도상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김명수는 대리보충의 상황을 얽매임 없이 유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조절하고 있다. 이른바 여백에 고착되지 않으면서도 묵의 농담에 잣대를 드리우지 않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결국 대리보충은 오직 사물을 바라보면서 그 사물 됨을 이루기 위해 보조 기술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물 자체(le chose même)는 그저 사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굳이 여기에다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원본의 본질에 대해서도 특별히 주장할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게 된다. 사물을 사물로서 받아들이는 순간 그 사물은 이미 존재로서의 형식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화가가 행위 하는 선(trait)이나 선묘, 그리고 색채는 의식 구조가 지시하는 대로 드러난다. 혹은 무의식 상태에서라도 은연중에 행위가 발산되어 버리는 묘책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그 결과 형식이 동원된 모방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모방은 차이를 차이로서 흘러 보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물을 재생시키기에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유유히 흘러 다니는 공간과 공간만이 은유화로서 암시될 때야말로 비로소 차이를 표방하는 행위는 자유로워진다. 
이러한 양상은 반음계나 빛깔(색채)로 지칭되는 크로마티크(chromatique)의 원리와 다름없다. 이른바 무엇을 표현한다는 일, 즉 사생이나 선묘, 그리고 색채는 이미 모방의 조건이 부여된 상태를 지닌다. 흔히 색채는 연속성으로서의 반음에 해당된다. 그것도 끊임없이 보충하고 첨가하면서 변화하는 연속체이다. 진정으로 결정될만한 표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물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표상은 결국 대리보충에 따른 것이며, 무엇을 채우려는 의지와 의도에 저항하는 탓에 스스로 방치해버린다. 
말하자면 자연이든 인공이든 복제는 눈앞에 사물이 놓여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에 가능하며, 더욱이 내 사고에 잠재되어 있거나 시선으로 말미암아 판단하는 까닭에 성립한다. 이 모든 행위는 기원을 스스로 구성 지어 버린다. 그러한 기원은 이미지 탄생을 보호하는 역할로서 자리한다. 따라서 텅 빈 상태로 비워두어야 지당하다. 
그런 이유로 색채의 운용은 유기체(organism)의 생명으로서 魂魄點染無法을 끌어안아야 한다. 그런 연후라야 淸淡해진다. 『六如居